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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의 귀재 '레이몽 클르망'의 3쿠션 해법서 'Mister 100' 본문

당구시스템

당구의 귀재 '레이몽 클르망'의 3쿠션 해법서 'Mister 100'

라스트히어로 2014. 8. 12. 00:38
벨기에 출신의 금세기 최고의 세계적인 당구선수인 레이몽 클르망은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40년간에 걸쳐 세계대회 35회와 유럽대회 48회, 그리고 국내대회 61회 등 모두 합치면 140회가 넘는 우승경력으로 명실 공히 세계 3쿠션 계의 정상을 지킨 살아있는 신화적인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3쿠션 우승경력 100회 기념을 의미하는 '미스터 100' 은 1979년 레이몽 클르망에 의해 초판이 출간되었으나 세계적인 열망에 의해 최근 재판이 출간되었다. 총 471 쪽으로 구성된 이 책은 많은 다이어그램과 사진이 수록되어 있고 설명이 간단명료하여 우수한 3쿠션 지침서로 판단이 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본문이 한글을 제외한 6개 국어(스페인어, 영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로 되어 있어 본문의 일부만 한글 해석으로 소개한다.



Mister100 내용


한 권의 책을 만든 후에 남는 감상은 즐거움과 고달픔이 뒤 섞인 인생과 같은 것입니다. 이 책의 이야기도 이러한 모양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옛날 두 사람의 남자가 각각 자기 희망의 실현을 꿈꾸며 각자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같은 목적을 향하여 걷고 있는 것을 서로가 몰랐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들 꿈의 실체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친해졌고 서로가 모든 것에 대해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이제 그들 꿈의 실체를 서로가 알게끔 되었습니다. 

때는 1975년 말경이었습니다. 서로의 견해가 검토되고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이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둘은 힘을 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의 성장과 같이 경탄과 열의 속에서 계획은 점점 구체화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백과사전적 요소를 가진 책자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슬픈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우수한 협력자였던 피에르 게이스만스씨가 지나간 세월과 같이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원대한 사업의 기술고문이었던 그의 서거로 인하여 작업은 불안에 휩싸인 채 일시 중단할 형편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슬픔을 딛고 오랜 생각 끝에 나는 전보다 더욱 힘을 내어 책 만드는 일을 계속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 후 실로 오랜 시간이 흘러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인쇄하게 된 때는 시작한 날로부터 무려 1156일이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표제에 부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간 인생을 뒤돌아 볼 때 어쩔 수 없이 착잡한 마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는 꿈꾸는 사람과 같이 말한다. “ 아 ! 그때가 정말 좋았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굉장한 작품은 내가 태어난 고향인 네-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곳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모텔에는 손님들을 위한 오래된 당구대가 있었다. 이 당구대에서 아직 10살이 채 되지 않은 소년이었던 나는 당구에 취미를 붙이게 되면서 그 언젠가 이 매력 있는 스포츠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깨닫게 된다. 실제로 나는 이 스포츠에 빠져서 여가의 전부를 당구에 투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구만이 나의 흥미를 끄는 유일한 스포츠였던 것은 아니고 축구도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나는 청춘의 정열 전부를 어떤 때는 축구에, 또 어떤 때에는 당구에 쏟게 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나는 이 두 가지의 스포츠를 계속하였다. 15세 때에 나는 다이아몬드 세공기술 직업을 갖게 되었으며, 그 덕분에 많은 시간을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스포츠에 몰두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나는 J . Lambrechts 씨를 만났는데 그는 매우 헌신적인 사람으로 여러 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내가 좋은 시합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의 조언을 하였고, 내가 참가하는 많은 국내 경기에 함께 참가하였다. 나에게 큰 은인이었던 이분은 나에게 Frans Rombouts 씨를 소개해 주었다. 그 후 2년간 이 선생님으로부터 당구의 기초 지식을 습득하였다. 지역의 여러 가지 경기를 경험한 나는 벨기에의 큰 대회에 눈을 돌렸다. 당시 내가 가장 존경하였던 분은 Rene Vingerhoedt 씨였다. 당구수업 기간은 길었다. 2m 30 cm의 당구대(우리의 것은 2m 44 cm 임) 전 종목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2m 84 cm의 당구대 게임이 허락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태만해지지 않고 연습을 계속 했다. 나는 위대한 챔피언인 Vingerhoedt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모방하여 그의 게임 방법을 나의 것으로 소화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당시 그가 보급한 3쿠션의 시스템을 마스터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축구를 잊지 않았고 우리 축구팀은 국내시합의 지방대회에 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만간 어려운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보다 강력한 팀으로 나의 이적이 결정되는 바람에 나는 슬픔을 머금고 축구를 버릴 결심을 하였다. 이로 인해 진정한 당구선수가 된 것이다. 내 나이 20세 때의 일이었다. 1년이 지난 후 나는 전 종목 1 급이었다. 그러나 3쿠션 경기에서 처음 승리를 얻은 것은 우연이라 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3쿠션 경기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타 종목의 기술도 빠르게 습득하였다. 그 후 수많은 선수권을 획득하게 되었는데 벨기에란 나라에서 한 종목에 최저 하나의 선수권을 획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의 성적은 높이 인정되었는데 결코 운이 좋아서는 만은 아니었다. 물론 모든 경기에는 만족스러운 성과와 덜 만족스러운 성과가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내가 가장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린즈에서의 세계선수권 대회 때의 일이다. 당시의 유명 선수들이었던 Marty, Galvez, Scholte, Hose, Beradi 등과 접전을 벌여 결국 승리 하였다. 또한, 67 - 68 년에 걸쳐 있었던 ‘스포츠 공로패’ 획득도 잊을 수 없는 자랑거리 중의 하나다. 


 한편 1975년도 3쿠션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일본의 ‘고바야시’ 에게 패배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당구에 대한 정열이 약간 시들해졌다. 나는 11년 동안이나 지키고 있던 세계선수권을 잃게 됐던 것이다. 사실 일본선수가 마지막 이닝에 6점 득점을 해서 60점 고지에 도달하여 선수권을 회득하였을 때 나는 59점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떤 세계 선수권 대회라도 경험할 가치가 있고 좋은 추억이 남는 법이다. 사실 모든 대회에는 그때마다 새로운 느낌과 아쉬움이 남게 되고 특히 마음 깊이 기억되는 일화도 있는 것이다. 내가 최초로 참가한 세계대회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나는 7위에 그치나 그 다음의 누스대회에서는 당시 세계 선수권자였던 아돌프 슈아레즈를 이기고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엔리크 나바라와 결정전을 치룬다. 결국 내가 우승하였으며 아르헨티나 선수가 2위가 되고 다음은 쉬츠, 슈아레즈 순이었다. 이 타이틀전에서 한 게임이 애버리지 2점 이상으로 끝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하겠다. 당시 페루선수인 슈아레즈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나는 29이닝에 60점에 달했다. 그때 받았던 경기장의 갈채를 쉽게 잊을 수가 없다. 이때를 시작으로 나는 열한번의 3쿠션 세계선수권 대회 타이틀을 획득하게 되었다. 안트웰에서의 고달픈 패배는 다음해 라파즈에서 그토록 갈망하였던 선수권을 획득하기는 하였지만 약간의 실수로 그 즐거움을 망쳐 놓기도 하였다. 주차장에서 발을 잘못 디뎌 오른발을 삐어서 얼음찜질을 하고 붕대를 감고 미국 당구협회 회장인 에릭슨 의사의 치료를 받고 나서야 오스트리아 선수인 쉬츠와의 최종전에 임하였다. 다행히 그때 선수권 획득은 확실하였으나 고달픈 오후였던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시합 중에 아픔은 점점 더해 갔고 중간에 치료를 요했었다. 이 예기치 않은 중단 후에 나는 다시 게임에 임하여 10점의 연속득점에 성공, 선수권을 획득하였다. 1개월 후 3쿠션 세계대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에 앞서 나의 발에서 세 군데의 골절을 발견한 의사는 6주간의 휴양을 명하였다. 나는 모든 계획을 망치게 된 불운에서 넉 다운 되었다. 그러나 끈질긴 치료와 휴식으로 골절이 다소 회복되어 토르네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이 대회에서 애버리지 1.3 포인터 이상의 성적으로 우승하지만 붕대를 한 다리가 좋지 않아 게임이 매우 천천히 진행되었다. 내가 시합 중 비정상적인 동작으로 움직이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다른 선수들은 아마도 신경이 꽤나 거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경, 카이로, 암스테르담......이 모든 대회가 좋은 시합, 완벽한 조직, 훌륭한 성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일이다. 3쿠션 세계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그곳의 우상이었던 로렌즈를 이겼는데, 이 시합은 매우 높은 수준의 긴 게임이었다. 투지만만한 아르헨티나 선수는 애버리지 2점 이상을 쳤고, 나도 비슷하게 그를 추적하다가 마지막 이닝에 9점 연속 득점으로 게임을 이기게 되었다. 그때 5000여명의 관중은 열광하여 일어섰고 그들의 박수와 환호는 5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남미인의 특성이라 할수 있는 열광적인 성격이 그대로 표출되어 경기장을 열광의 도가니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한번이라도 체험해본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때때로 불리한 환경이 경기에서 선수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습한 공기는 당구경기에 달갑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라스베가스 에서는 한 시간 경기를 한 후에 에어컨을 정지시키고 다시 경기를 재개했는데 그제 서야 당구공이 정상적으로 굴렀다. (너무나 건조했던 탓에). 라파즈 에서는 공의 굴절이 하도 이상하여 정상적인 경기를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우리는 자키를 사용하여 당구대 수평을 수리한 적도 있었다. 이 무렵 나는 각종대회에서 매직넘버 100회 이상의 승리를 꿈꾸게 되었다. 나는 ‘선수권’이라는 말보다는 ‘승리’라는 말을 선호한다. 본 저서의 해명은 물론 100개의 타이틀을 따는 것을 의미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당시까지 내가 공식적으로 획득한 타이틀은 99개 뿐 이라는 것이다. (후에 100개의 타이틀을 성취함). 그런데 그것은 이러하다. 1971년 센트에서 내가 2/4분기 선수권을 획득했지만 불행한 일에 의하여 그 빛을 잃었다. 이 벨기에 선수권 대회중 선수중의 한명이었던 마셀 반디크가 집으로 가던 도중 얼어붙은 도로에서 차가 미 끄러져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여기에서 당시의 선수권은 이 친절하고 인기 있는 고 마셀에게 주기로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공식적인 100회의 승리를 거둔 것은 다른 대회에서였는데, 당시에 ‘뵈리네 켄스5종목 ’, ‘서던 볼’,‘ 시모니스 컵’ 등과 같은 대회에서의 승리는 공식기록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100이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나의 진정한 목적이 되었다. 나는 25회 세계선수권 대회를 겨냥하였다. 근래에 이를 달성했는데, 이 라스베가스 대회에서 내가 거둔 성적은 총 애버리지 1.68 즉 36이닝 동안에 각 게임 60점 획득이 된다. 나는 기록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기록은 반드시 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를 언급하는 것은 독자들이 3쿠션 세계대회가 어떤 수준에서 치러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나의 야망이 하마터면 백일몽으로 끝날 뻔 했던 적이 있다. 메이요우러 그란드 ‘유럽 5종목 ’ 경기에서 나는 2위, 데이리스에서는 3위에 그쳤는데 , 뜻밖에 네덜란드 반데르 미셍이 왕좌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나는 코펜하겐, 브르게즈, 라스베가스에서 이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브르게즈에서 열린 보크라인 선수권 대회에서 마티는 단 한 번의 이닝으로 71/2의 게임을 끝마쳐 나를 패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전적 상으로 데이리스가 가장 위험한 상대였다. 그는 그전에 열린 벨기에 보크라인 선수권 대회에서 총 애버리지 19.71을 마크했다. 그런데 데이리스가 보통 때 보다 훨씬 못 미치는 바람에 나의 승리가 수월해 졌다. 한편 투지만만한 프랑스의 코네송이 3이닝 때 마지막 큐로 199점을 마크하여 불운한 쉬츠를 물리쳤다. 이리하여 나와 코네송의 결정전이 이루어졌다. 극도로 긴장된 가운데 나는 수비에 치중하여 이 경기를 승리하여 보크라인 세계선수권 타이틀을 획득한 것이다.



당구 선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진정한 당구선수를 목표로 하는 젊은이가 선천적 재질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재능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물론 재능만이 충분한 조건은 아니고 연습도 중요한데, 이 양자가 조화를 이룰 때 좋은 성적이 약속된다. 재능위에 기술을 습득하고 훈련을 참아내는 의지가 합해져야만 싸움에 임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다. 위의 모든 요소가 당구선수의 장래를 결정한다. 약간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나 챔피언이 되려면 ‘이겨야한다' 는 의지가 꼭 필요하다. 노력 없이는 여기에 도달할 수 없다. 또한 경기자는 경기 중에 100%의 집중력을 발휘 해야만 한다. 경기자는 지는 경험을 맛볼수록 단련되어 지고, 이를 새로운 힘의 원천으로 하여 결국 챔피언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연습은 종류와 양에 있어서 철저해야만 한다. 하나의 완벽한 샷(Shot)을 마스트하기 위해서 동일한 샷을 50회, 심지어는 60회 이상 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스승자격인 후원자들은 이러한 점에 인색함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연습은 하루 6 -7 시간이 소요 되는데, 이에 의하여 선수는 훈련되고 정상에 이르는 길이 서서히 열리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선수는 정신을 통일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컨디션을 유지하고 의지를 강화시키게 된다. 이러한 기간은 약 10년까지도 소요된다. 젊은 선수가 때로 희망을 잃고 단념하는 일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이 길고도 험한 훈련시기에서이다. 끝까지 좌절하지 않은 강자만이 살아남아 언젠가 세계챔피언이 될 수 있는 법이다. 건강, 정신단련, 규칙적인 생활 등은 중요한 요소이다. 권하고 싶은 것은 당구계의 훌륭한 스승을 만나 그를 관찰하고 모방하는 일이다. 나는 나의 스승으로 Vingerhoedt를 삼았고, 다른 선수들은 그들의 스승으로 Dielis, Boulanger, Wafflard, Schrauwen, Corin 등을 삼았다. Scherz와 Scjolte 그리고 내가 시범경기차 일본에 초대된 일이 있었는데. 이 시범경기는 필름에 녹화되었다. 이중 우수한 부분들은 편집되었다. 고바야시 자신이 말하듯이 그는 3쿠션과 특별히 나에 대한 3시간 분의 필름을 편집하여 연구하였다 한다. 후에 그는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하게 된다. 당구를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에게 내가 권하고 싶은 말은 ‘Straight-rail' 경기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여기부터 시작하면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는 'Balk-Line' 경기와 쿠션게임을 할 수 있다. 사실 이들 게임은 각각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므로 , 젊을 때 이런 스타일의 기술을 마스터하는 것이 좋으리라 여겨진다. 또 이러한 게임은 당구 전체에 있어서도 체인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셈이다. 3쿠션 게임은 이와는 다른 영역이다. 허지만 위에서 말한 게임을 마스터한 선수는 훈련을 많이 한 탓으로 익힌 기술을 다른 샷 패턴으로 응용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3쿠션부터 시작한 선수 보다는 더 빠르게 필요한 트릭을 익힐 수 있게 된다. 물론 여기에 예외는 있지만, 예외란 처음부터 법칙이 있음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외를 하나의 격언으로 인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3쿠션 게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필요한 스트로크 기술을 마스터하는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다음에 선수는 3쿠션게임에 필요한 특유의 샷 자체를 마스터해야 한다. 각각의 샷이 그려내는 정확한 코스(볼이 지나가는 길)를 예상할 수 있으면, 염려하는 키스(일명 쫑)를 피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경험을 쌓게 되면 어떠한 샷을 구사할 것인가를 구별하게 되고, 독자가 나의 ‘RC 포인터 시스템’(레이몽 끌루망 시스템)을 철저히 연구하게 된다면 공이 굴러가는 진로를 예상할 수 있으며 그 최종 도착지점을 알 수 있게 된다. 3쿠션 게임에서는 미리 모든 것을 예상하고 계산하여야만 한다. 만일 다른 플레이어가 정확히 이루어졌지만, 샷에서 실수한다면 선수는 그 실수를 지적하여 자신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선수는 실력을 증진시틸 수 있는 것이다. 기분 내키는 대로 큐를 뻗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며, 이는 이미 당구가 아니다. 3쿠션 게임에서 선수는 다음 샷이 어렵게 되지 않도록 공을 이동시켜야 한다. 때로 행운의 여신이 미소 지을 수 도 있지만, 너무 이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내가 고안한 포인트 시스템을 응용한 연타 샷으로 수많은 3쿠션 게임에서 애버리지 1.50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다. 나의 외람된 생각인가는 모르겠지만 이 시스템이 3쿠션의 유일하고도 현명한 숙달법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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