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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과 같이 항상 영원한 서양화가 황성규 본문

에세이

처음과 같이 항상 영원한 서양화가 황성규

라스트히어로 2015. 10. 14. 08:38

서양화가 황성규와의 인연은 1970년대 초반 청소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낙동강이 구비 쳐 흐르는 아름다운 소도시에 소재한 중고 병설학교 미술 동아리 활동시절 부터이다. 비 오는 날 교실에서 정물화를 그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365일을 야외 작품 활동을 하였다. 평일은 방과 후 학교 주변 산야를,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소도시 일대를 무대로 사생활동을 전개하였다. 복숭아꽃과 사과 꽃들이 만발한 마을들로의 사생 활동은 지금도 생생하고 감미로운 추억으로 가슴속에 남아있다.

동아리에 가입을 하게 되면, 훌륭하신 미술선생님의 지침으로, 철저한 선후배 관계와 위계를 중심으로 하는, 그야말로 자율적인 활동이 6년간이나 지속이 되는데, 이는, 내재된 자연의 아름다움을 충실히 재현해내는 뛰어난 자연주의적 표현력을 체득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묘사력의 향상은 괄목상대의 경지에 이른다. 혹자는 오늘날 성공적인 학교 동아리 교육을 위해 그 시절과 비교하고 지향하려 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굶주림이 일상이었던 그 시절은, 하루 세끼의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부모들의 최대 지상과제였음은 주지의 사실로, 오늘날과 달리 학부모들이 어설픈 논리로 간섭하지도 않고, 전적으로 학생의 진로를 학교에 일임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오늘날 학교 현장의 사례로 보면 크게 성공할 학생들이 부모의 지나친 간섭과 오판으로 실패한 경우를 빈번히 볼 수 있다.

여하튼, 서양화가 황성규는 표현상의 한계 때문에 추상화로 전환하는 많은 작가들과는 달리, 청소년기에 습득한 뛰어난 묘사력을 바탕으로,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풍경화위주의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자연주의 화가 밀레와 코로’, 인상주의 화가피사로와 시슬레에 필적하고, 때 묻지 않고 그저 맑기만 한 그의 영혼과 혼합으로 그려지는 풍경화들은 소박한 한국정서가 물씬 배여 나와 더욱 정겹다. 

필자가 지극히 어려웠던 시절, 순수주의 작가의 자존심도 고사하고 몇 점의 작품을 흔쾌히 희사해준 해맑은 그의 영혼은, 인생여정에서 사소한 이해득실임에도 불구하고 난무하는, 배신과 단절의 상처에 강렬한 대비로 그려져 영원한 풍경화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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